오월의 사회과학

저자
최정운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2-05-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광주’는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너와 나의 경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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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부끄럽게도 5.18을 너무 몰랐다. 그러면서 잘 알고 있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 하다가 군인들에게 맞아 죽은 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열흘 동안의 일인지도 이제서야 알았고, 그 기간동안 항쟁파와 수습파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5.18에 관해 무지했다.


 이 책은 노암 (@noamzin)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최소한 황석영을 읽고 개요를 아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나 역시 황석영의 저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각주:1]>를 읽고, 위키백과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항목을 통해 5.18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고, 이 책을 통해 좀 더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5.18을 정부의 공식 명칭대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5.18을 단편적으로만 설명하는 것 같다. 물론 그 계기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였고, 이후 한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생각해 본다면 5.18과 민주화는 뗄레야 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동기는 -저자도 지적하듯이-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항쟁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 글 제목도 공식 명칭 대신 5.18 광주 항쟁으로 표기하였다. 보통 같이 많이 따라붙는 민중, 민주, 혁명 등의 수식어는 5.18을 설명하기에 부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운동이라는 표현에 대해 "'의거'나 '항쟁'과 같이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투쟁이 아니라 무슨 평화적 시위 같은 것으로 재현(p.68)"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책 중반이 넘어가면서 항쟁파와 수습파의 갈등 부분이 나왔을 때 나는 계속 생각했다. 군인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이성적 판단은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내가 그 당시였다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그리고 그 당시의 내 위치가 중산층의 시민인지, 대학생인지, 노동계층 시민군인지에 따라 판단은 달라졌을까.


 그리고, 그때 그 공수부대원들은 지금 5.18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고, 폭도들을 잡은 것일 뿐, 애국한 거라고 여전히 착각 속에 살고 있을까. 당연히 전두환은 나쁜 놈이고 당시 신군부 지휘부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군인들이 단지 국가 폭력에 이용당한 병정들이었다고 하기에는 저들의 죄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당시의 일을 고백한 용기있는 공수부대원도 있다. (한 공수부대원의 5.18 회고록 )


 저자는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온 부모님으로부터 1953년에 부산에서 출생하여 곧 서울로 올라와 살았다. 머리말에서 부모님과 자신의 출생지와 거주지를 제일 먼저 밝힌 것은 그 지역과 무관한 자신을 알림으로써 5.18이 광주의 지역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제임을 보이려는 의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너 전라도 출신이라 이런 글 쓴거 아니냐는 치졸한 의심을 초반부터 걷어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1부는 5.18에 관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담론이 주제다. 다소 학술적 얘기여서 읽기 시작할 때 집중하기 조금 힘들었는데, 2부부터 읽고 마지막에 정리 차원에서 1부를 읽어도 될 것 같다.


 아래부터는 책 내용을 발췌해가며 내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정리한 거라 책의 표현과 겹치는 게 많다. 그리고 당연히 빠진 내용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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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정부 폭력의 배경


1980년 5월 18일의 일을 알기 위해 그 이전의 시대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가보면 5.18 전날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있었고, 이 전에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시기였다. 서울의 봄이 오게 된 계기는 1979년 10.26, 즉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사건 때문이다. 그리고 김재규가 암살을 마음먹은 큰 계기 중 하나는 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의 부마항쟁이었다. - 이 책에서는 부마항쟁 대신 부마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


 이 책의 4부 1장에서는 5.18에 나온 폭력의 배경을 살펴보고 있다. 5.18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생 데모에 나온 폭력은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과 상응되는 것이었고, 양자의 폭력은 게임을 이루고 상징적 폭력 수준에 머물렀다.


 박정희도 이 구조를 쉽게 깨지는 못했지만 공개적 독재 선언이었던 3선 개헌 이후 이 폭력 게임의 균형을 영원히 뒤집고자 했다. 1971년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대학에 진입시켜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했고, 70년대 후반부터는 군대, 특히 정치적으로 활용 가능한 부대들에게 데모 진압작전을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1979년 말 10.26 직전의 부마사태는 새로운 계획의 실험장이었다. 결과는 일견 대성공이었다. ... 공수부대의 데모 진압은 교범에 따라 훈련된 사항을 실시하는 것을 넘어 혹독한 공수부대 훈련의 스트레스 그리고 직업 군인들이 갖는 전통적인 사회에 대한 열등감과 질시, 나아가서 '비싼 돈 주고 대학 다니는 놈들'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이 쌓인 야수들을 풀어놓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아무나, 아무데나 실컷 구타하고 기분을 풀었고 장교나 지휘관들도 부하들을 대도시에 진압 명령과 함께 풀어놓으면 그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공수부대의 진압은 부마사태부터 합목적적, 공적 국가 폭력수단의 사용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사적 원한을 폭력으로 자유롭게 해소하는 잔인성의 카니발이었다. (pp.296-297)


 10.26 이후의 1980년 초는 서울의 봄 시기로 위와 같은 정치 폭력의 역사적 흐름에서 예외적인 시간이었다.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민주화를 시대 과제로 선언했고, 오히려 당시 집권을 계획하던 신군부는 학생들의 고전적인 데모[각주:2]를 유도하여 그것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 민주화의 흐름을 차단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당시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15일 광주에서도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광주에서와 같이 경찰은 진압을 포기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평화적 시위가 전개된 것은 실로 신군부에게는 경악할 일이었을 것이다. 대학생 데모가 혼란이 아니라 화합으로 나타난다면 신군부는 자리가 없어질 것이고 이른바 'K공작'은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결국 5.17쿠데타가 일어났고 5.18이 터졌다.




초기 공수부대의 만행과 광주 시민들의 항쟁


 18일 오후부터 광주 시내에 출동한 공수부대는 실로 터무니없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폭력은 당하는 사람 외에 보는 사람에게도 공포를 주는 것이었는데, 한마디로 전시적 폭력이었다.


 병사들은 부마항쟁 이후 10.26, 12.12 등 연속되는 사건들로 반년 넘게 외출 외박을 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훈련에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여기에 군 조직 내의 지역 차별 문제와 연관되어 광주에서의 작전은 자유로운 분풀이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p.155)


 개개 병사들의 폭력은 폭력과 잔인성의 경쟁으로 번져나갔다. 게다가 이런 경쟁은 부대 간에도 이루어졌다. 부마항쟁 때보다 길어진 진압봉으로 패고 군화발로 차는 폭력은 일상적인 폭력이었다. 병사들은 잡혀온 시민들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이 정도의 폭력이면 모두 숨고 시위는 끝났어야 했고, 정부와 공수부대도 이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19일 오후가 되자 회사원, 아주머니, 아저씨, 심지어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공수부대와 시위대 간의 힘의 균형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민들이 참여한 동기에 대해서는 2부 3장에서 민주화의 열망과 그를 대변하는 학생운동, 호남 차별에 대한 불만과 원한, 민중적 저항운동의 역사와 전통, 경제적 구조, 전통적 공동체 문화 등으로 설명하며 그 한계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2부 4장에서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을 작용하게 한 촉매로 공수부대의 엄청난 만행을 든다.


 공수부대는 인간을 짐승처럼, 짐승보다도 못하게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지향했던 그 폭력을 본 폭력극장의 관객들 또한 비굴한 존재로, 인간 이하로 전락시켰다. ...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과감히 투쟁에 참여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해 이성으로 하여금 공포를 뚫고 과감히 분노를 분출하도록 내린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p.158)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는 1부 5장에서도 나온다.


 개인적 차원에서 광주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인간의 존엄성까지 짓밟는 폭력이었다. 그들이 투쟁한 동기는 바로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이기 위해서였다. ... 인간의 존엄성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 공동체 차원의 투쟁의 동기는 생명의 보호였다. ... 그들이 총을 놓는 조건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인간이었던 모습을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pp.113-114)


 20일 오후 상당수의 시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중심가로 서서히 몰려들었다. 공수부대는 극악해졌고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시민들은 극도의 적대감에 타오르게 되었고 시민들과 공수부대는 총력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공수부대는 시내의 중요 거점을 대대단위로 지키기 시작했고, 시내에는 많은 해방구들이 생겼다. 밤에는 기사들, 시민들의 차량시위대도 등장했다. 시내 여러 곳에서 시민들 간에는 2부 5장에서 설명하는 절대공동체가 이루어졌다.


 폭력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수치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민들이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 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 절대공동체였다. (pp.171-173)


 20일 밤 시민들은 허위 방송을 일삼는 MBC에 방화했고, 세무서와 KBS에도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감정의 폭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찬반 논쟁의 결과에 따른 행동이었다.


 21일 오전 시민들은 계엄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가 준비된 상태였기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오후 한 시경 사격이 개시되었고, 한 시 반쯤 장갑차 위에서 웃통을 벗고 태극기를 휘날리던 청년이 사살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시민들도 총을 들었다. 그런데 총을 나누어주고 총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 광주 시민들은 계급을 보았고, 일반 시민은 시민군들과 분리되어 투쟁에서 소외되었다.


 계급에 대한 이야기는 ... '학생들은 다 빠져나갔다'는 말이 제기... 이는 부르주아들에 대한 원망과 비슷한 것이었다. ... 대학생들에 대한 원망과 노동자계급과 기층민들에 대한 불안감은 절대공동체와 이전의 광주공동체에서의 계급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객관적으로 노동자계급이 주로 무장했다는 사실은 절대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가권력을 의식한 사람들, 또한 이 공동체에서 극적인 일체감과 해방감에 만취했던 사람들은 바로 항쟁 이전에 전통적 공동체에서 경계선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 서러움을 당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나아가서 절대공동체가 국가로 진전되고 그 절정에서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하자 이전에 공동체의 주인이라 느꼈던 계급은 두려움을 느끼고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pp.188-189)


 초기에 군부는 18일부터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하여 일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했고 광주의 지방 일간지들은 20일부터 휴간했다. 최초로 전국 언론에 보도된 계엄사 발표는 21일 오전이었고 '서울을 이탈한 학원 소요 주동 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로 내려가 사실 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트린 데 기인'되었다고 했다.


 21일 오후 계엄사령관의 담화가 있었는데, 오전과 달리 학생 시위와는 아무 관련 없는 것으로 제시, 현실 불만 세력은 뒤로 빠지고 불순인물 및 고첩이 주요 음모 조직으로 등장한다. 나아가서 무력을 사용할 것을 확언하며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 자애'해야 한다는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일간지 같은 면에 김대중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보도하면서 김대중과 5.18이 연결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해방광주와 항쟁파-수습파의 갈등


 22일 아침 부지사와 도청 간부, 일부 직원들의 수습대책회의를 열고 광주의 유지들, 각계각층의 대표 등을 모았다. 각계각층에서 한 사람씩 선출되어 15인의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들은 오후에 상무대를 방문, 무기를 회수하는 대가로 지나친 진압을 인정하고 자극적 어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대다수 수습위원들의 입장은 혁명적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신속히 무기를 회수하고 반납하고 5.18을 없던 일로 물리자는 것이었다.


 수습위 말고도 다른 세력으로 도청 수습위원회 결성 모임에 참가하길 주저한 재야인사들이 모인 남동성당파가 있었고, 운동권 경력이 있는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녹두서점 팀(후에는 YWCA 팀)이 있었다. 한편 무장한 시민군들은 21일 오후부터 저녁 내내, 22일은 거의 하루 종일 외곽 지역에서 전투를 벌어졌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광주에 내려온다는 방송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청 앞으로 모였지만 총리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오후 5시쯤 수습위가 계엄사와의 협상에서 돌아와 협상 결과를 보고하자 시민들은 처음에는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사에 반납하여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무렵 명노근 교수와 송기숙 교수에 의해 정식으로 대학생들이 조직되는 게 시도되었고 시민군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수습'이라는 말에 우선 반발했고, 대신 '전투 본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학생들이 나서는 것에 반발했다. 이에 송교수는 현재 시민군은 조직력이 없고 따라서 수습을 하여 질서를 잡아야 싸우든지 말든지 할 것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학생들은 사건을 일으켜놓고 모두 도망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5.18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들이었고, 무장 시민군들과 시민수습위원들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고향을 우리 손으로 지킨다'와 민주주의는 두 개의 5.18 투쟁의 명분이었다. ... 시간이 지날수록 ... 끝까지 싸워야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광주 시민들의 담론을 지배하게 되었다. ... 명예회복이란 구체적으로는 사건의 원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보상 등을 말하며 원칙적으로는 현 정부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윤리적 우월성을 명시적이고 공개적으로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 요구에는 다시 이 우월성의 지표로 민주화 요구가 포함되었다. (p.56)


 대부분의 시민들은 두 가지 원칙, 기존 공동체와 절대공동체 그리고 질서 회복과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을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 간의 갈등은 모두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기존의 공동체가 복구되고 절대공동체가 분열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논리와 감정들이 작용했다. 첫째, 개인의 정체와 계급 문제가 등장했다. 둘째, 기존 공동체의 핵심 제도인 가족의 감정과 의무감이 되살아났다. 마지막으로 생명의 소중함이 개인의 재등장과 함께 다시 부각되었다. 투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해방되자 도청에 나온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당연히 궁극적 가치로 제시했고 이러한 입장은 투쟁의 열기가 식어가며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p.235)


 표면적으로 가장 큰 갈등은 무기 회수 문제였다.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계엄군의 위협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였다. 수습파들은 억울하고 분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더 무장을 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쟁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들과는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


 시민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질서를 회복하자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총기를 계엄사에 반납하여 계엄군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진압할 수 있도록 하여 싸움을 끝내자는 데에는 강하게 반발했다. 시민들이 원한 것은 무기 회수를 통한 질서와 군부와의 투쟁이었다. 계엄사에서 광주를 폭도가 들끓는 무법천지라 매도하고 있는 이상 시민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다.


 군부의 입장에서 보면 광주 문제에 대한 당시 최선의 해결책은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반납하도록 하여 광주시를 단시일에 무혈점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광주 시민들이 과거를 '반성'한 것으로 전제하고 군부는 5.18의 모든 치부를 없었던 일로 돌리고 '폭도론'으로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p.237)


 23일부터 도청의 수습위원들과 YWCA 팀은 일반 시민들이 정상적인 일상, 경제생활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 합의했고 그렇게 공식적으로 권고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공식적인 입장은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그 결과는 시민들 간의 투쟁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도청 안에서는 수습파들이 우세해졌고 항쟁파는 무기를 계엄사에 반납한다는 데는 결사반대였지만 일단 질서를 위해 무기를 회수하는 데는 찬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기회수반은 시민군과 갈등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무기를 회수했다. 24일 새벽부터 수습위원회의 성직자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기 회수 직업을 시작했다. 시민군들은 자신의 생명은 포기한 지 오래지만 광주 시민의 생명에 대한 주장에는 마음이 약해졌다.


 무기 회수 작업으로 무장 시민군의 숫자는 몇 백 명 정도로 줄었다. 그리고 22일 아침에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던 시민군 조직들도 24일을 전후하여 해산되었다. 24일 밤 마지막까지 싸워야 한다는 입장으로 학생수습위는 사실상 해체되어 대학생과 시민군은 같은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계엄사는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찬물을 끼얹으려고 25일 아침에 독침사건을 시도하였다. 이후에 또 많은 시민군들이 총을 놓고 돌아갔고 지역방위대는 25일 오전 중 거의 다 무장 해제되었다.


 반면 계엄군은 진압작전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21일부터 광주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여 항쟁이 확산되지 못하게 막았고, 24일에는 진압작전의 구체적인 계획과 예행연습에 들어갔다. 26일 새벽에는 시민들의 전의를 시험해보고 작전을 위한 보급 및 수송로 확보를 위해 탱크와 부대를 진입시켰다.


 항쟁지도부는 26일 정오 무렵 궐기대회에서 정부에 대해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요구했고 그들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끝까지 투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궐기대회 도중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군이 곧 소탕에 나선다는 전단을 뿌렸고, 다음날 새벽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확실한 정보가 전해졌다. 군중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지도부는 최후까지 싸울 사람은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라며 각자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자고 했다. 약 500명의 시민이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남았다.


 계엄군들이 쳐들어온다는 통보를 받은 도청 간부와 시민군들은 각자 나름대로 엄숙히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실제로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각자 '살고 싶은 사람은 집에 가라'는 권고를, 광주 시민의 이름으로 또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27일 새벽 계엄군은 사방에서 밀려 들어왔다. 도청 정면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계엄군이 일제 사격을 시작했다. 일부 살아남은 시민군들은 손을 들어 항복했고 그들은 모두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날 새벽 도청에서 사망한 숫자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상무대 영창에서 학생들과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사식도 먹고 몰래 면회도 했지만 노동자들은 그러지 못했고, 두 계급 간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실망, 원망 그리고 적대감을 안고 현실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만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가 다른 삶을 사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 다시 계급 간의 이해에 근거한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져왔다. 첫 단계는 지식인들과 노동자 출신들과의 직접 대화였고, 다음 단계는 소양 강좌였다. 노동자 출신 시민군들이 변화하기 시작한 결정적 이유는 자신들이 왜 싸웠고, 그 목적은 무엇이었고 그리고 그 싸움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나를 배운 데에 있다.


 5.18 이후의 광주는 내부적인 갈등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 5.18을 겪고 비로소 지식인들은 몸의 중요성을 알았고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언어와 조직, 그리고 사회 분석을 배웠고 이들의 표면적 갈등과 투쟁의 연대는 5.18 이후 군부와의 투쟁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pp.337-338)


 한편[각주:3] 31일 계엄사는 <광주사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5.17 계엄 확대 후 유독 광주에서만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켰음을 강조한다. 나머지 부분은 지역감정을 촉발하는 유언비어에 선동된 시민들에 의해 시위 양상이 극렬해졌다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은 고첩과 불순분자의 계획된 소행으로, 불순분자와 간첩, 그리고 학생소요 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해 온 김대중을 두 배후 집단으로 지목했다.


 6월에는 육군본부 명의로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우선 폭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흑색선전을 강화했고, 일차적 정치 세력을 불순분자와 고첩에서 김대중 추종 세력으로 교체하였다. 배후세력으로는 김대중 추종자, 깡패 및 룸펜, 용공간첩의 순서로 배열했다. 연행자 730명 중 학생은 18%이며 나머지는 '무직, 공원, 납품 팔이 등 노동자 그리고 넝마주이들'로 분류하여 5.18을 시민의거로 보는 시각에 재를 뿌리기 위해 이들을 폭도의 주 세력으로 부각시켰다.


 이후 5.18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다가 1983년 말 학원 자율화 조치에 따른 학생운동권의 부흥과 함께 다시 시작했고, 84, 85년을 통해 5.18을 다시 해석하는 글들이 발표됐다. 19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으로 인하여 비로소 5.18은 공공의 논의 주제로 떠올랐다. 5월 30일 신민당은 광주사태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6월 7일 국방부장관은 '광주사태 보고'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폭도라는 말 대신 난동자라는 표현을 썼고, 과잉 진압론을 다시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7월부터 전국 월간지들은 미문화원 사태와 관련지어 5.18을 보도했고, 이해 5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곧 판금 조치되었지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때부터 전국 언론에 의해 5.18은 거의 모두 광주 시민의 시각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은 5.18 담론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으로서는 김대중을 복권시켜 김영삼과 경쟁시켜야 노태우의 당선이 가능했고, 김대중이 복권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5.18도 복권되어야 했다. 6월 항쟁 이후 정치가들은 앞 다투어 5.18과 민주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88년 2월에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가 결성되어 증언을 청취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정부는 민화위의 권고에 따라 4월 1일 <광주사태 치유 방안>을 발표하면서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나아가서 5.18은 민주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공식적으로 일부 복권시켰고 부상자 및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발표했지만 책임자에 처벌은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5.18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 담화는 나름대로 5.18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추구한 운동으로 복권시켰다. 그러나 진상규명에 관하여는 훗날에 맡기자며 이를 포기하는 것으로 6공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담론과 음모론


 1부 4장에서는 여러 담론들에 대해 다룬다. 그 중 요즘에도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폭도론과 불순 정치집단론, 2부 2장에서 다루고 있는 음모론을 소개하려 한다.


폭도론

 폭도는 단순히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어떤 폭력 행위를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그 행위 주체를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말이다. 이 말이 공개적으로 쓰인 것은 폭도라 부르는 대상에 대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배경이었고 이 담론은 권력을 배경으로 제시된 것이다. 폭도라는 말을 계속 사용한 것은 군부가 현실 불만 세력이라 지칭했던 집단은 평소에 가진 뿌리 깊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을 이 기회를 틈타 폭력과 방화 등으로 표출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5.18은 엄청난 사태로 발전되었다는 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 규정을 반복한 것이었다.


 폭도론은 5.18에 참가한 이들 계층들이 계엄사의 선전과는 달리 투쟁 기간에서 해방 기간을 통해 시민정신을 발휘했다는 사실로 일단 충분히 반박된다. ... 폭도론은 계엄사에서 당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5.18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오해되어 온 것을 감안하면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폭도론은 해방 기간에 광주 일부 시민들에게도 받아들여졌으며 이로 인해 시민군들은 빠르게 무장 해제 당했다고 볼 수 있고... (pp.82-83)


불순 정치집단론

 군부가 수사권과 법적 권력 그리고 물리적 폭력 장치를 독점하고 있음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시위대에 극단의 폭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서 시민들을 이간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 우선 구속자 중에 간첩으로 기소된 사람은 없었다. 군부는 많은 구속자들을 고문하여 간첩으로 몰려 했지만 정책을 바꿔 '김대중 추종 집단'으로 기소했다. ... 무엇보다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이나 고정간첩이나 남파간첩의 조작과 선동에 따라 싸웠다는 설명은 5.18의 전체적 현실에 비추어 설득력이 없다. (pp.84-85)


 그러나 당시 북한 방송은 5.18을 중계 방송하듯 보도하고 있었고 상당수의 북한 요원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북한 공작에 관하여는 연구의 여지를 남겨놓아야 할지 모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음모론

 '북괴 음모론'은 군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기되기는 했으나 정치적 이유에서 적용되지 않았고 따라서 폐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음모론'은 군부에 의해 초기에는 조심스럽게 제기되었으나 ... 중심적으로 부각된 것은 6월이었고... '김대중 음모론'은 김대중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처벌하는 공식 죄목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형 집행은 모두 중지되었다. ... 김대중 음모론으로 기소한 죄목들이 많은 증언을 통해 날조된 것으로 드러나... 김대중에게 공작금을 얼마나 받으면 또 얼마나 '사주'를 받으면 대한민국 공수부대와 맨몸으로 맞싸울 수 있겠는가? ... 시위대를 선동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식으로 보조적 역할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선동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한에서만 효과적일 것이다. (pp.125-126)




관련 사이트 및 영상


5·18 기념 재단

5·18 기념문화센터

5·18 민주화운동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토픽)

역사 다시보기 - 5.18민중항쟁 (영상)

유네스코가 말하는 5.18의 진실 (영상)

5.18 민주화 운동 (5분사탐-한국근현대사 EBS 영상)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보도와 국내 언론 보도의 차이 (영상)



  1. 올해 5월 간행 예정이던 증보판은 내년 5월 정도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5월 15일 한 청년이 버스를 탈취하여 전경에 돌진, 전경 한 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그 예 [본문으로]
  3. 이후 내용은 1부 2장 뒷부분과 1부 3장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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