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바다

Posted 2015. 3. 15. 12:28


문명과 바다

저자
주경철 지음
출판사
산처럼 | 2009-03-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바다의 관점에서 근대 세계를 해석하다근대 세계사를 바다의 관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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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 인상 깊게 본 주제는 사탕수수와 노예의 관계, 은과 차(茶)와 아편의 관계, 그리고 일본이다. 사실 일본은 한국을 통해 중국 문명을 받아들인 곳으로만 인식했었는데, 세계 흐름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은 (거의) 중국과만 교류하며 세계의 변방 느낌이라면, 일본은 은과 구리를 수출하며 세계 무역에 일조했고, 16세기 중반 총을 얻으며 서양 문물을 빨리 접했다. 일본이 섬나라라서 고립됐다는 말도 있지만, 오히려 한국이야말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고립되어 세계 흐름을 받아들이는 게 늦어진 게 아닌가 한다. 한편으로, 중국이 명나라 초기 해양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총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역사, 그리고 아시아의 역사,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 분명 많이 달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남미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수많은 아프리카 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남자들이 많이 끌려갔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성비 불균형과 여성 인권 하락 문제까지 일어났다. 한편 사탕수수에서 만들어지는 설탕은 값싼 칼로리 섭취물이 되어 유럽 노동자들을 버티게 했다.

 고전적 화폐사의 큰 줄거리는 '아메리카의 귀금속 생산 - 유럽으로의 유입 - (물품 수입 등으로 인한) 아시아로의 유출'이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중국과 인도, 동남아시아로의 은과 구리의 수출도 화폐사의 한 기둥이다. 유럽에서는 차(茶) 수입이 급증해 대금으로 결제할 은이 부족해지자 아편 무역을 시작한다. 아편무역으로 중국경제는 타격을 입고 유럽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다른 책인 '대항해시대' 이야기를 많이 한다. 대항해시대보다 가볍고 쉽게 쓰인 책이 이 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도 대항해시대를 쓴 후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을 쓰고싶었다고 서문에 밝혔다. 한겨레에도 연재됐던 기사를 다시 정리한 책인데, 그래서인지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아래부터는 읽으면서 발췌,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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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시아의 바다에서
아시아의 해양세계

 한때 인도양은 교역의 중심지였다.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 모두 인도양을 통해 소통했고, 중동을 통해 유럽도 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중요 교역 연결점이 있는데 말라카도 그 중 한 곳이었다. 포르투갈인 토메 피레스의 여행기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84개 언어가 통용됐다고 한다. 중국이 동아프리카까지 나갈 정도로 세력을 넓히다가 갑자기 문을 닫았는데, 이후 일어난 유럽의 해상 팽창은 세계사 흐름을 갈라놓은 분기점이었다.

정화(鄭和)의 원정(1405-33)
 무슬림 가문출신의 환관 정화는 원래 마호메트를 가리키는 마(말마)씨였다. 1405년부터 14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8천 톤급 대선박이 중심이 되어 60여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소선에 2~3만의 인원을 통솔하여  18만 5천 Km을 항해하여 인도양 세계를 탐험했다. 인도양 연안의 30개국을 방문했으며,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왕래했다.
 이렇게 해양 세력의 중심이었던 중국은 곧 해양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북방 내륙의 이민족들의 위협과 농민 봉기, 북경 천도 등으로 국가의 무게 중심이 북으로 이동하였다.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 세력이 유교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기반으로 삼은 관료들에게 몰락하였다. 중국은 지대물박(중국의 땅은 거대하고 물자가 풍부하다)하여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충족되므로 바깥에서 구해올 것이 하나도 없다며 철저한 고립주의를 표방했다. 결국 중국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화교 공동체의 발전과 핍박
 명대 이전 중국은 활기찬 해상 교류를 했고 남부 연안 주민들은 아시아 각지로 퍼져 나가 화교 사회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해금정책 이후 해상 교류는 금지되었고 비밀리에 교역하게 되었다.
 에스파냐 인들은 1570년 군사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공격을 감행, 점령하여 마닐라를 거점삼아 중국과 교역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많은 중국인들을 불러들였고, 해외와 교류하고 싶어 했던 중국 주민들의 이해관계도 맞아 떨어져 30년 정도 짧은 기간에 수많은 중국인이 몰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자국민의 해외 거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쳐 총 4만여명 이상의 중국인이 에스파냐 인에게 학살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국법을 어기고 해외로 나간 자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입장으로 화교들을 방치했다. 국가의 후원을 받는 유럽 세력과 개인이 살아남아야하는 화교 세력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제국으로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아시아에 들어올 때 상업 거점을 확보하고 교역을 확대해나갔다. 강력한 정치 체계가 확고했기 때문에 회사 형태를 통해 식민 지배체제의 기반을 마련해갔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00년 전에 아시아에 진입한 포르투갈 상인이나 세계 최초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영국을 앞질러 2세기 동안 패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일본, 대만, 시암, 수마트라, 말라카, 인도, 아라비아 등 20곳에 상관을 설치해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이용해 아시아와 유럽간 수출입을 수행하면서 아시아 안의 여러 지역 간 무역을 하는, 소위 현지무역(country trade)을 수행했다.
 1623년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가 영국을 공격하는 암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서 밀린 영국은 인도를 집중 공략하며 면직물을 유럽에 수입, 대박을 터뜨렸다. 현지 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기계를 도입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이에 다시 인도 작물업은 타격을 입게 된다. 19세기가 되면서 회사에 의한 식민 지배에 한계가 오자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해체하고 직접 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제2부 폭력이 넘쳐나는 세계
유럽 팽창은 마음속에서부터 자라나다

 유럽이 해상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한 요인을 종교관에서 찾고 있다. 성경에서 묘사된 지상낙원을 실재한다고 믿은 유럽인들이 지상낙원을 찾아 동쪽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베스트셀러였던 맨드빌 여행기에는 이런 세계관이 담겨있었고, 유럽인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포르투갈 : 삼대륙에 걸친 해상제국
 포르투갈은 세계의 해상 팽창의 뇌관 역할을 했다. 유럽의 변방 소국이 해상 제국으로 발전한 것은 기적처럼 보였다.
 8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 세력에 들어왔고, 이후 기독교권 기사들이 영토를 되찾았다. 투철한 종교관을 갖은 십자군 기사계급과 14세기 부르주아 혁명 이후 등장한 상인 계층이 포르투갈 해외 팽창 시업의 두 축을 이루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기독교권과 이슬람권 경계에 위치하여 기독교권의 영토 회복이라는 종교/군사 이데올로기와 이슬람권의 문화와 문물이 뒤섞인 곳이었다. 또한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있어서 지중해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을 통해 해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위험했기에 주변국인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먼저 진출하게 되었고, 성공이 보이자 중심국인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진출하게 된 것이다.

폭력의 세계화
 총포와 화약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개발되었으나 북쪽 기마민족과 싸울 때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효율적이지 않다고 단정하고 총포를 포기, 창, 칼, 활 등의 기존 무기로 돌아갔다. 총포는 중국 안 공성전에서 효과를 발휘했으며, 공성전이 많았던 유럽에서 총포가 발전할 수 있었다. 이후 이들은 선상에서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까지 얻게 된다. 이런 힘을 앞세워 유럽인들은 해상에서 약탈하거나 통행증 발급 등을 통해 세를 불려나갔다.


아메리카의 ‘발견’?
 콜럼버스가 출항한 1492년은 에스파냐가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를 정복했고, 유대인을 축출함으로써 종교적 배타주의가 강화된 해이다. 이방인과 이교도를 몰아내며 힘을 키운 중하급 전사 귀족들을 중앙에서 통제하기 힘들었기에 이들은 해외 정복으로 내보내졌다. 게다가 당시 유럽인들은 마녀사냥과 종교개혁 등으로 극히 공격적이었기에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이들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바야돌리드 논쟁
 이런 잔혹함이 옳은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논쟁의 정점은 1550~51에 있었던 바야돌리드 논쟁이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스파냐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격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동부 유럽,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종교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정의로운 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 라스카사스 신부는 아메리카대륙의 인디언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들이 에스파냐 국왕의 신하가 되게해야 한다고 하면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또한 인디언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흑인 노예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3부 근대세계의 이면, 선원과 해적의 세계
‘사막의 배’와 바다의 배

 낙타는 원래 쌍봉낙타였으나 더운 지방에 살게 된 낙타는 표면적을 줄이기 위해 단봉낙타로 진화했다. 쌍봉낙타 수놈과 단봉낙타 암놈 사이에 태어난 잡종은 힘이 좋아서 비단길과 같은 장거리 수송용에 많이 쓰였다. 그러나 1톤 화물을 이동하기에는 낙타 20마리에 8~10주의 기간이 걸렸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근대 세계의 경계를 만들어낸 것은 바다의 배였다.

선원들 :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선원들의 삶은 익사할 위험이 있는 감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선박은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한 중요한 요소로서, 근대 공장과 같았다. 이런 관점에서 선원들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볼 수 있다.

해적과 국가
 해적은 처음에 국가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강탈할 권리를 위임받아 국가 대신에 공격행위를 하는 민간업자들로 시작됐지만, 나중에 변질되어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약탈행위를 하는 무법자가 되었다. 영국의 드레이크라는 인물은 16세기 에스파냐 선박을 해적질하며 후에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역사학자 닐 퍼거슨은 영국은 '해상폭력과 도둑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해적국가로 출발했다고 저서에 기술했다.

해적과 민주주의
 일반 선원들은 해적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고된 선원생활 때문에 기꺼이 해적선에 합류하려 했다. 해적선에는 많은 인원이 있어 노동 강도는 줄고, 약탈한 물품은 공평하게 나눠 갖기 때문이다. 해적 내부에 규약이 있는데 그 내용이 평등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제4부 노예무역 잔혹사
아프리카 북 · 동쪽 노예무역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에는 대서양의 노예무역과는 별도로 북쪽의 지중해 방향과 동쪽의 아시아 방향으로 또 다른 노예무역이 존재했다. 북/동쪽으로 끌려간 노예들은 주로 집안일이나 각종 하급 직종의 일을 한 반면 대서양을 통한 아메리카 노예들은 대규모 집단 노역을 하였다.

설탕과 노예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아랍 지역에서 재배됐다가 지중해 지역으로 전해졌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는 언제나 대규모의 집약적 노동력이 필요했다. 노동 자체가 고되고 노동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이 노예노동이었다.
 노예제와 사탕수수는 함께 움직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사탕수수를 전했는데, 이후 사탕수수 재배가 확대되었고, 노예를 소유한 농장도 등장했다. 이전까지는 유럽인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17세기 중엽 이후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크게 확대됐고 플랜테이션체제가 자리 잡았다.
 설탕이 대규모로 생산되면서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던 것이 점차 일상적인 소비재가 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칼로리 섭취가 증가하는 데 설탕이 기여한 몫이 크다. 신대륙에서 노예들에 생산한 설탕은 구대륙 노동자들의 준 노예화로 귀결됐다.

노예무역과 아프리카 내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크게 확산되고 노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노예무역의 규모도 커졌다. 그 결과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노예 상인들이 침투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광풍으로 해당 지역의 인구가 감소했고, 특히 남자가 많이 끌려갔기에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했다. 농사에 큰 지장이 초래됐고, 극심한 일부다처제가 생겨나면서 여자들의 신분이 낮아졌다.




제5부 세계화폐의 순환
금과 은을 찾아서

 화폐 관점에서 근대의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금과 은의 대규모 생산과 대륙 간 이동이다. 그리하여 세계경제에 화폐가 풍부하게 공급됐고 각 지역이 경제적으로 연결됐다. 15세기부터 유럽인들이 해외로 나간 동기 중 가장 타당한 설명 중 하나는 금을 찾아서이다. 중세에 유럽에서 사용됐던 금의 최대 공급처는 아프리카 내륙 지방이었다. 아메리카대륙에 그들이 처음 도착하여 찾은 것은 금과 은이었다.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다
 고전적 화폐사의 큰 줄거리는 '아메리카의 귀금속 생산 - 유럽으로의 유입 - (물품 수입 등으로 인한) 아시아로의 유출'인데, 이것은 보충과 수정이 필요하다. 유럽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은이 유입되는 현상, 중국에서 일본으로 금이 유출되는 대신 일본에서 중국으로 은이 유입되는 현상, 한동안 일본 구리가 동남아시아로 다량 흘러간 현상, 멕시코와 마닐라를 연결하는 정기 항로가 개설되어 아메리카의 은이 마닐라에서 중국의 비단과 교환되는 현상 등이 서로 얽혀있다.
 은이 유입되면서 비단산업이 크게 발전해 거대한 해외 수요를 만족시키면서 중국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반면 막대한 노동력의 집적물이 싼값에 빠져나가면서 경제 성장은 가져왔으나 경제 발전은 저해되었다.

일본의 은과 구리
 일본에서는 16세기 중반 금광과 은광이 많이 개발되었다. 중국 비단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결제하는 데에 은이 많이 필요했다. 17세기부터는 일본의 은 수출이 줄고 구리가 많이 수출됐다. 은과 금같은 귀금속은 고액결제에 쓰였다면, 소액결제를 하는 광범위한 사회계층에서는 구리가 많이 쓰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지역에 일본 구리의 80%정도가 수출되었다. 이는 대금을 금으로 지불해왔던 동인도회사가 점차 금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구리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한 까닭이다. 금과 은의 상대가치에서 금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은과 구리를 수출한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부터 금을 수입했다.

인삼과 은
 일본은 대마도-조선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다량의 은을 송출했다. 일본에서 인삼에 대한 수요가 엄청 커서 이 경로를 통해 조선의 인삼을 수입하고 다량의 은이 조선으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자체적으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북아메리카 산 산삼이 발견되면서 이것이 싼값에 일본으로 수입되자 조선의 인삼 수출은 저해되었다.

아편 연기 속에 사라져간 은
 이전까지만 해도 이편은 중국에서 고가의 진통제로 부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약품이었는데, 1781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 무역을 독점하고 인도의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일반인의 아편 흡연이 확산됐다.
 유럽에서는 18세기 차 수입이 급증해서 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거액이 필요했다. 그동안 줄곧 아메리카에서 은이 유입되었지만, 사탕수수와 담배 등의 상품을 구입하게 되면서 은을 대량으로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심각한 결제수단 부족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아편 무역이다. 18~20세기 중국의 아편 수입은 엄청나게 급증했는데, 특히 1818년 값이 싸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내는 파트나(Patna) 아편이 개발되면서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 밖으로 유출되었고 심각한 경제 문제를 야기했다.
 중국에서 은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은 가치가 급등하고 동전 가치가 급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민들의 실질소득이 떨어지고 물가가 급등하며 국고 수입이 감소하는 등 경제 전체가 뒤틀리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반면 제국주의 세력은 아편이라는 '유사 세계 화폐'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6부 물질과 감각의 교류
차와 도자기
 유럽에 차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초반에는 차가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받아들여졌다. 특히 차는 영국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차가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수요가 높아졌다. 노동자들에게 설탕을 듬뿍 넣은 차를 제공하면서 수분과 열량을 싼값에 제공할 수 있었다.
 차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안정적으로 수입하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이 교역을 하지 않으려했기 때문에 불법으로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 대금을 지급하는 방법도 문제여서 아편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런 방법들이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기 시작했다.

작물의 전파 : 기술과 문화의 결합
 1543년 포르투갈의 모험가 핀투가 일본에 표착하여 영주에게 화승총을 바쳤다. 당시 화승총은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으나 일본은 유럽보다 빨리 성능을 개선을 했다. 특히 연속발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열을 지어 차례로 총을 발사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무모한 행위를 가리키는, 총(뎃뽀) 없이 덤벼드는 무뎃뽀라는 말도 나왔다. 일본은 총을 앞세워 임진왜란에서 큰 효과를 봤다.

다네가시마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총포류를 버리고 원래 무기인 칼로 복귀했다. 이런 이유에 대해 노엘 페랭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칼을 중시하는 사무라이층 인구가 7~10%정도로 많았고 반발도 컸다. 일본은 섬이어서 외적의 방어가 용이해 총이 크게 필요 없었다. 일본에서 칼은 사무라이의 혼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상징이다. 총에 대한 외국인 혐오 감정까지 덧씌워졌다. 칼은 미학적으로 아름답지만 총은 아름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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