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현대 침묵사

Posted 2015. 5. 8. 12:23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

저자
정길화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6-09-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PD들이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우리...
가격비교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각주:1]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100편 중 PD들이 꼽은, 꼭 짚어야 할 20개의 역사적 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다루고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허투루 넘어갈 만한 게 없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사건이나 전두환의 3S 정책같이 잘 알려진 얘기도 있고, 보도연맹, 북파공작원, 1994년 불바다 발언과 전쟁 위기 등 당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널리 알려진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알려졌더라도 이 책에서는 표피적인 얘기뿐만 아니라 그 배경 등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강남 건설의 뒷이야기, 기지촌 이야기, 소파(SOFA)의 배경,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미국에서의 위상 등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읽는 경험 이상이다. 책장을 넘기며 '이게 국가인가'라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삼청교육대의 가혹행위, 녹화사업으로 끌려간 학생들의 의문사, 보도연맹 학살 등은 국민에게 자행 된 국가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이다. 정부의 지원에 의해 운영된 기지촌 이야기는 충격이었고, 1994년의 한반도 위기는 정부의 실책으로 나라가 어디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였다. 일본의 핵개발 음모는 요즘의 미일관계와 자위대의 확장 등을 생각해 볼 때 섬뜩한 주제다.

 방송에는 나왔지만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그리고 방송에서도 안 다뤄졌지만 암울한 현대사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단지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서, 현재 저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하고 감시하기 위해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래에는 각 주제를 다룬 방송과 연결해두었다. 각 장의 줄거리를 요약했는데, 여기에 다 옮기면 너무 길어져서 짧게 다시 정리하였다.
(그래도 길긴 길다. 특히 1994년 한반도 위기는 내용도 중요하다 여겨지고, 줄이기도 힘들어 더욱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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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억압과 폭력의 나라
불행했던 도시 빈민의 역사, 무등산 타잔 : 김동철 2005년 5월 15일 (일) / 제 94 회

 1977년 광주에서 철거반원 일곱 명 중 네 명이, 자신의 집이 강제로 철거되고 불에 태워지자 격분한 박흥숙에 의해 쇠망치로 살해된, 세칭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발생한다. 철거 과정 중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에게 지붕 위의 천막을 걷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움막에 불을 붙였다. 당시 박흥숙 어머니가 모아둔 30만원을 천장에 두었는데 다 불타버린 것이다. 이후 철거반원들은 박흥수네 위쪽에 살던, 당뇨와 폐결핵을 앓고 있던 부부 집으로 향했다. 이에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을 위협하며 올라가는 것을 막고 시장에게 따지려 하는 혼전 중에 결국 사고가 터졌다.

버림받은 인권, 삼청 교육대 : 채환규 2002년 1월 27일 (일) / 제 47 회
 1980년 쿠데타 군부에 의해 이른바 '사회 정화'의 일환으로 기획된 삼청교육대. 가공할만한 사망자와 희생자를 내며 한국전쟁 이후 단일사건으로 최고의 사건이지만 그 실체와 성격은 역사에서 지워지고 가려지고 있다. 이들은 군부대에 수용됐는데, 무차별 폭력과 가혹행위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낳았다.
 전두환 정권은 계엄이 해제된 후 삼청교육생을 계속 구금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계엄령 해제를 한 달여 앞둔 1980년 12월 18일 사회보호법을 공포하고 교육대 수련생들을 영구히 감금할 법적 근거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청송 감호소에 수용되기로 결정됐는데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구금으로 시위가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2005년 9월, 청송에 갇힌 감호자와 재소자들의 거듭된 단식투쟁 끝에 결국 사회보호법은
폐지되었다.

군대 가서 죽은 내 아들아 : 이규정 2000년 7월 23일 (일) / 제 18 회
 빨간 민둥산을 푸르게 가꾼다는 취지의 녹화사업. 그러나 1980년대 군부에 의한 녹화사업은 반체제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강제 징집자와 운동권 학생 입영자가 자술서를 작성한 후, 의식 개조 작업을 받고, 그간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과 보안사에 협조한다는 동의를 한 후 관제 프락치 활동을 하게 됐다.
 1980년대 초, 사병 여섯 명(이윤성, 정성희, 최온순, 한영현, 한희철, 김두황)의 죽음을 군 당국은 자살로 발표한다. 이 중 최온순만 유일하게 후에 타살로 공식 발표됐다. 강제 징집에서 의문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 내용이 방송에 최초 공개되면서 일부 희생자는 국립묘지에 묻히게 되었고, 국가 배상도
받았다.

버림받은 애국심, 북파공작원 : 이규정 2002년 2월 24일 (일) / 제 50 회, 2003년 3월 23일 (일) / 제 66회
 북파공작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1년 육군첩보부대 HID가 창설되면서부터다. 이후 1955년 해군 첩보부대 UDU가 창설되었고, 1968년 김신조 일당 침투 이후 북파공작은 활성화되었다. 공작원을 모집하면서 국가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전과 기록 말소와 억대 보상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가운데 일부는 사회 복귀 후 군대 기피자로 몰려 거듭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사명감으로 특수 임무를 수행했건만 보상이나 명예회복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협작과 감시, 생존의 위협까지 받으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반세기를 울분과 신음으로 연명해왔다.

5공의 3S 정책, 스포츠로 지배하라 : 강지웅 2005년 5월 22일 (일) / 제 95 회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영화를 검열로 억압했다면, 1980년대의 문화 정책은 규제 완화의 방향을 취했다. 하지만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문화에 대한 검열과 금지는 여전했거나 더 강화됐다. 5공 정권의 3S 정책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스포츠였다. 독재 정권이 국민을 동원하고, 국가가 정한 목표에 집중케 하는 데 스포츠만큼 효과가 큰 것도 없었다.
 박정희 정권 때 시도됐다가 10.26으로 유야무야된 올림픽 유치는 전두환의 의지로 강하게 다시 추진되었다. 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까지는 어떠한 정치적 혼란도 이견도 용납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살인적인 철거도 용납됐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지지는 전두환이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발판이 됐고, 대외적으로도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전두환의 이미지를 바꾸는 효과를 낳았다
.



2. 풀리지 않는 역사 속 미스터리
땅에 묻은 스캔들, 정인숙 사건 : 김동철 2000년 10월 8일 (일) / 제 26 회

 1970년 당시 26세였던 정인숙은 친오빠인 정종욱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정종욱은 살인죄로 19년 20개월을 복역하였다. 당시 정인숙은 장관급 이상 정도 되는 사람들만 갖을 수 있는 회수여권을 갖고 있었고, 갖고 있던 수첩에는 고위 인사 26명의 이름이 있었다. 이 수첩은 수사 당국으로 넘어간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공안 사건이 아님에도 서울지검 공안부가 담당했다. 김형욱 회고록을 집필한 김경재는 1971년 대선을 앞둔 박정희에게 정인숙은 도덕성에 타격을 줄 암적 존재로 여겼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입을 다물고 있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 장형원 2004년 4월 4일 (일) / 제 78 회
 박정희와 김재규는 경북 동향이고, 일제시대 만주군 시절 같이 생활한 육사 동기이며, 군인 생활을 하다 한때 교직에 몸담은 적이 있는 듯 비슷한 점이 많다. 박정희도 김재규를 중용했고, 김재규도 박정희를 각별히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락, 차지철 등과는 달리 온건파의 모습으로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부마항쟁이 시작되었고, 18일 부산 지역에는 부분 계엄 하에 계엄군이 진주하였다. 차지철은 불량배나 불만 세력의 폭동으로 보고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김재규는 온건한 대처를 주문했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질타하며 차지철의 강경 노선에 힘을 실어 주었다.
 평소 박정희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철통같이 지키며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그러나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연회를 위해 마련한 건물로, 경호 주체가 중정의 경비원들이다. 10월 26일 연회가 당일 갑자기 결정되었기 때문에 거사를 미리 계획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총을 가지러 가까운 방을 두고 먼 곳으로 간 것이나, 총을 가지러 가면서 부하들에게 거사를 지시한 것을 보면 우발적 범행이라고도 보기 힘들다.

김형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이규정 1999년 11월 28일 (일) / 제 10 회
 김형욱은 1963년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어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기 위한 각종 사건을 공작한다. 동백림 사건으로 유학생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고,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3선 직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고, 박정희에 대한 배신감에 젖어 본격적으로 반박정희 활동을 시작한다. 김형욱은 미국 청문회에 나가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박 정권과 관련된 감춰진 사실들을 낱낱이 공개하였다. 이후 정인숙 피살 사건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 등 박정희 정권에 치명적인 내용이 담긴, 원고지 5천매 가량의 회고록이 완성된다. 박정희는 김형욱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김형욱은 돈을 받기 위해 파리로 떠났고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친일파, 그들만의 면죄부 : 정길화 2002년 3월 10일 (일) / 제 52 회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들은 한동안 숨을 죽이며 살았지만, 맥아더는 포고령을 통해 일제하 관리들의 현직 복귀를 천명하였고, 여기에 면죄부를 준 것은 이승만이었다. 1946년 11월 관구장의 63%, 총경의 83%, 경사 이상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고, 1947년 서울의 10개 경찰서장 자리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1948년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경성되면서 친일 경찰들은 최대 위기를 맞는다. 노덕술은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다. 반민특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승만은 노덕술의 석방을 요청했고, 두 차례에 걸쳐 친일 경찰 기술자들을 옹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체포한 조사관과 지휘관을 체포하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이무렵 반민특위의 친일파 수사 압박으로 위기에 몰린 친일 세력과 친일 경찰들이 주동이 되어 테러리스트를 시켜 반민특위 간부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터진다. 또한 경찰은 특경대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로 맞선다. 그리고 1949년 친일 경찰 출신 시경국장과 종로경찰서장이 이승만의 승인을 얻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6.6 사태가 일어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고, 체포된 안두희는 헌병대로 인계돼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고 한다. 당시 헌병 사령관으로 수사를 맡은 이는 전봉덕이다. 안두희가 체포된 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 헌병 사령관 장흥이 해임되고,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 양 과에 합격해 경시까지 올른 엘리트 친일 경찰 출신 전봉덕이 사령관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강남공화국이 있다 : 유현 2004년 4월 11일 (일) / 제 79 회
  서울 인구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보이자 인구분산을 위한 획기적인 대안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1963년 서울시 경계가 확장되면서 한강이남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다. 또 다른 강남 개발의 필요성은 안보상의 이유였다. 한강 이북에만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있어 전쟁이 나면 참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남개발에 시동이 걸린 것은 한남대교가 착공된 1967년이다. 한남대교는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되었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강남 개발에 가속도를 붙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부 주도형 개발 사업이면서도 오히려 땅값이 올라야 개발 비용이 나오는 방식이라 정부가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개발지상주의 하의 이 선택은 필연적으로 투기를 불러왔다.
 건설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받던 관료와 건설 재벌, 언론과 전문가 집단은 공동의 이해관계로 뭉쳐 한국 부동산 투기의 견인차가 된다. 이러한 투기 집단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사건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이다. 1970년대의 10년간 실질임금이 두 배 상승할 동안 전국의 땅값은 열다섯 배나 올랐고, 강남은 200배가 올랐다.


3. 헤어나지 못한 굴레, 레드 콤플렉스
분단의 너울, 연좌제 : 정길화 2000년 9월 17일 (일) / 제 24 회

  남북 대립 속에 연좌제에 연루된 대상자들은 체제의 잠재적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다. 국가는 이들을 법적 근거도 없이 보안 사찰과 신원 조회를 통해 감시했다. 연좌제의 효용은 연좌의 형벌을 통해서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제압하거나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없애는 것이었다.
 연좌제에 대해 비난이 거세지자 5공 정부는 1980년 연좌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이를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1984년에도 문공부 장관이 신원 조회 기록을 전부 삭제한다고 발표했고, 1987년 6공 헌법에도 연좌제 폐지를 명문화해서 선포했다. 그러나 1990년  폭로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서도 사찰 카드에 개인의 신원 정보뿐 아니라 가족 관계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1998년 폭로된 경찰의 민간인 사찰을 보면 여전히 가족이나 주변 인물에 대한 감시와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 : 김환균 2000년 10월 15일 (일) / 제 27 회
 이승만 하야 이후 조용수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선거에 나섰지만 떨어졌고, 30~40석을 예상했던 당의 당선자도 일곱 석에 그쳤다. 조용수는 대중들에게 혁신계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여기고 신문을 창간하려 했다.
 당시 가장 커다란 현안은 한미경제협정이었는데 민족일보도 창간호부터 이 협정이 자주 경제를 해치는 부당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장면 정권이 미국에 예속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장면 정부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 이른바 2대 악법을 제정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2대 악법 규탄대회가 잇따랐고, 조용수도 반대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민족일보는 3일간 정간되었다.
 1961년  5월 조용수가 끌려간 지 나흘 후 치안국은 조용수 일당이 대남 간첩과 접선하여 조총련으로부터 자금을 불법으로 들여와 민족일보를 발간했고, 북한에 적극 동조해왔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어느 것 하나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지만, 1961년 12월 21일 혁명재판에 의해 조용수는 사형되었다.


잊혀진 대학살, 보도연맹 : 이채훈 2001년 4월 27일 (일) / 제 29 회, 2001년 5월 5일 (일) / 제 30 회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이른바 반공 검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로, 좌익 전력이 있는 인사들을 보호하고 이끌어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섭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좌익과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설득하는 작업도 병행됐다.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고, 시골에서는 곡물을 배급해준다는 약속을 하며 가입을 권유했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장은 보도연맹원을 포함한 모든 불순분자를 체포하고 지시가 있기 전까지 절대 풀어주지 말라는 명령서를 각 경찰서에 하달했다. 이 사람들은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에 의해 대부분 학살당했고, 이때 희생된 사람은 최소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승만은 6월 28일 '비상사태 하 범죄 행위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했다. 이적 행위자에게 재판 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한 초헌법적 법안이었다.
 보도연맹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4.19 혁명으로 민주화의 물결이 일어나자 피해 유족들도 조심스레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5.16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들은 진상 규명에 앞장선 주동자들에게 반국가 행위자라는 낙인을 찍고 사형, 무기징역 등 극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보도연맹 사건은 50년이 넘도록 철저히
은폐되었다.

대한반공청년단의 비밀 : 김환균 2004년 7월 18일 (일) / 제 84 회, 2004년 7월 25일 (일) / 제 85 회, 2004년 8월 1일 (일) / 제 86 회
  (납북포로나 대한반공청년단에 대해 잘 몰라서인지,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특히 한 개인의 증언을 토대로 쓰인 장이기에 내용 정리가 쉽지 않다.)
 그동안 대한반공청년단에 대한 UN과 국군의 지원 및 비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UN과 국군이 조직적으로 행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되어갈 무렵 미소 양측은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심리적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지 주목했다. 미국이 생각한 방안 중 하나는 포로들로 하여금 자유 진영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었다.
 제네바협정은 포로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실행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교육이 협정 위반은 아니다. 그러나 1951년 6월부터 시작된 CI&E, 즉 민간정보교육 프로그램의 핵심은 공민교육이었고, 이것은 전향 프로그램이었다. 1952년 1월 4일 UN군 전범조사과에서 대한반공청년당 중앙당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네바협정 위반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은 진실인가 : 곽동국 2002년 2월 3일 (일) / 제 48 회
 김일성 가짜론은 항일 유격대 내에 두 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에 1934년에 합류해 이후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가 되고, 진짜 김일성은 왕청 출신의 김일선으로, 보천보 전투 후 사망했고, 일제 말 전설의 주인공은 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짜론은 이명영에 의해 4인설로 체계화되었다. 1대는 김성주로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으며, 2대는 김일성으로 1대 김일성이 죽자 후계자로 파견됐다는 것이다. 3대가 북한의 김일성으로, 2대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성주라는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꾼 후 1945년 평양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설의 김일성은 일본 육사를 나온 김광서로 오래 전 소련으로 돌아가 사망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료와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 참여한 김일성이 맞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나 이후락도 김일성의 항일 운동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반면 북한도 신격화 과정에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풀려 선전하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사실에 가깝게 언급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부터 과장하고
강화했다.



4. 미국과 일본, 당신들의 대한민국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 운동 : 이모현 2003년 2월 9일 (일) / 제 61 회

 기지촌은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후원되고 규제되는 국가적인 시스템이었으며 한미동맹의 음지이자 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 발전을 위해 외화 벌이가 절실했고, 이러한 달러벌이에 기지촌 여성들을 앞세웠다.
 1960년대 후반부터 각종 문제점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성병이었다. 미 본토에 비해 일곱 배에 가까운 수치로 미군들이 성병에 감염되자 사령부는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매우 불안한 북한과의 관계와 흔들리는 대내 정치적 입지로 주한 미군의 주둔이 절실했던 박정희는 한미 1군단을 방문해 기지촌에 대한 미군의 불만을 듣고, 이후 청와대 직속 기지촌정화위원회가 발족된다. 정화 운동의 핵심 사업은 성병 퇴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기지촌 정화 운동에 미군은 만족하며 감사를 표했고, 박정희 정권과 주한 미군 사이의 긴장은 많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들에겐 한미 동맹의 평화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다.
초기 치료제로 사용됐던 페니실린이 부작용이 많았고, 체질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처방해 특이 체질인 경우 죽기도 했다. 미군들에게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해도 기지촌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계속 살인 사건은 일어났지만 미군 부대의 고압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와 SOFA때문에 제대로 수사되지 못했고, 한국 경찰들도 성의를 보이지 않으며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1994, 불바다 발언과 전쟁 위기 : 최승호 2000년 7월 9일 (일) / 제 16 회, 2003년 1월 26일 (일) / 제 59 회
  북한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고 미국은 이를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동안 한국 정부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북미 간 대화는 전쟁을 피하고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제안에 의해 받아들여져 대화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북한을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북한은 NPT 탈퇴를 유보하고 IAEA의 감시 활동을 중단시키지 못하도록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북미 간 합의 이후 뉴욕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해줬다고 비난하며 북미 간 대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보수 언론은 북미 대화에서 남한이 가만히 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고, 김영삼은 언론의 압박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북미 대화는 진행되었고, 북한이 자신은 핵무기를 동결하고, 미국은 무력 사용 및 위협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미국은 이를 타당성 있다고 보았고, 한국 외교 라인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런 포괄적 접근안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들은 정부가 미국과 북한에 끌려 다닌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1993년 11월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은 포괄적 접근에 합의하기로 하였으나 김영삼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 접근이라는 표현은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접근으로 바뀌었고, 국내 언론은 김영삼의 반대로 정책을 바꾸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정책의 변화로 받아들이고 이후 미국이나 IAEA와의 협상에서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북미 간 협상 실패는 이후 전쟁 직전까지 가는 극단적 대치 이후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때의 내용은 애초 포괄적 접근과 별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 1년의 시간만 소비하고, 한반도를 전쟁 위험에 노출시킨 꼴이 되었다.
 1994년 3월 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마지막, 8차 실무 회담이 열렸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측이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김영삼은 북한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강경 발언을 하는 등 남측의 강한 반응을 보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북측 대표는 '불바다 발언'을 한다.
 당시 정부는 불바다 발언 '이후' 북측에 최고 당국자에 대한 비방을 즉각 중지할 것과 국민에 대한 반정부 투쟁을 즉각 중지하라는 긴급 제안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자료나 증언을 보면 이 긴급 제안은 불바다 발언 이전에 나왔다. 즉, 남측이 이전 회담에서는 제기하지 않았던 새 조건을 내놓자 북측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퀴노네스는 당시 대표단이 청와대로부터 북한의 어떤 제안도 거부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정부는 북핵 문제를 북미 간 대화보다는 안보리 회부를 통한 압박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불바다 발언 이후 한국 국방장관은 통일 전쟁을 운운하며 전쟁 불사론을 외쳤고, 페리 미 국방장관도 한국에 대한 무기 증강을 요구했다. 페리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의 무기를 들여왔고, 미 연구소에서는 영변 폭격 가능성을 시뮬레이션 했다. 시뮬레이션 결과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보자 클린턴은 다시 협상을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원자로의 연료봉을 교체했고, 남한은 안보리에 회부하기 위한 외교 활동을 계속 했다. 북한은 안보리 제재는 곧 전쟁이라고 반발했고, 미국은 제재를 하기 위해서는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한반도 근해로 이동시키고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하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다. 북한군이 병력 증강을 참아줄지가 문제였으나, 미국은 그것이 북한군의 공격을 부르고 전쟁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이를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주한 미군 시령관은 주한 미 대사와 의논하여 주한 미국인을 빠르게 소개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주한 미 대사가 이런 내용을 통보하자 그제야 김영삼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다. 그동안 미국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병력 증강을 막은 것은 백악관으로 걸려온 카터의 전화였다. 카터는 3차 북미 대화를 재개한다는 답변을 할 권한을 요청했고, 곧이어 언론에 대화 재개의 가능성을 밝혔다. 김영삼은 평양에서 돌아온 카터를 반겼지만, 조선일보는 여전히 마땅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이나 당시 비서실장, 외무장관 등 당시 정부 고위 인사들은 은퇴 후에도 미국이 영변을 폭격할 뻔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영변 폭격은 계획에는 있었지만 여러 반대로 테이블에 올라오진 못했고, 안보리 제재에 대비한 한반도에서의 병력 증강을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국 대통령이나 정부 관계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사태 이후 10년이 지나도 관계자들은 잘못된 추측을 하고 있던 것이다.

소파, 동맹의 초석인가 덫인가 : 이모현 2003년 4월 27일 (일) / 제 70 회
 소파(SOFA : Status Of Forces Agreement, 주한 미군 지위 협정)의 기원은 한국전쟁 당시 맺어진 대전협정이다. 1950년 7월 미국은 피란 정부를 꾸린 이승만에게 미군에 대한 일체의 형사 재판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강간 등의 미군 범죄에 대해 정부는 미군의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이후 소파 협상에 대한 논의는 계속 있었지만 미국이 미루기도 했고, 이승만 정부도 한미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적극적이지 않았다.

 장면 정부 때도 논의가 있었지만 5.16으로 중단되었다가 소파 협정을 요구하는 시위로 미국은 다시 협상에 나온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을 요구한 우리 측 제안을 거절하고 대전협정과 다를 바 없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불평등한 내용의 초안을 내놓았다. 이후 협상은 계속 지연되었다.
 1965년 한미 관계는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전기를 맞게 된다. 이후 소파 교섭 회의에서 미국의 태도 변화로 활기를 띠었고, 1966년 1월 총 82차 회의를 끝으로 31개 조항에 완전 합의한다.
 그러나 모든 재판권은 미국이 우선적으로 갖는다는 최종안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다. 재협상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 부통령이 베트남 추가 병력 파견 요청을 위해 방한했다. 결국 미국은 재협상을 받아들였고 비공무 중 사건의 1차 재판권을 한국에 넘겨주기로 미국이 양보했다. 대신, 사건 발생 15일 이내에 재판권 행사를 알리지 않으면 재판권이 자동 포기된다는 브라운 각서 조건이 붙었고, 한국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966년 7월, 체결을 촉구한 지 13년 만에 소파 조인식이 이루어졌다. 그 후 21년간 소파는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소파 개정 논의가 시작되었고, 1998년 임산부 폭행 사건이나 이태원 집단 난동 등 미군 범죄가 잇따르자 소파 개정 여론이 분출되며 마침내 미국은 협상에 응했다.

맥아더, 영광스런 그의 전쟁 : 김환균 2003년 5월 11일 (일) / 제 72 회, 2003년 5월 18일 (일) / 제 73 회
 한국전쟁은 영웅의 등장을 위한 화려한 무대인 동시에 그 영웅의 퇴장을 위한 무대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맥아더의 전쟁이었다. 연합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북한군을 모조리 몰아낼 것이라고 했고, 두 달 반 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자신의 예언을 실현해 냈다. 인천 상륙 13일 만에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맥아더는 미국이 전 세계로 나아가 어느 나라도 넘보지 못하는 위대한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맥아더에게 한국전쟁은 미국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발이었지만 동시에 미국의 힘을 더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38선 이북으로 적군을 몰아내 전전 상태를 회복하면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맥아더는 한반도 끝까지 진격하길 원했다.
 그런데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으리라던 맥아더의 장담은 틀린 것이었다. 중국 참전으로 맥아더와 트루먼은 의견을 달리 하며 사이가 틀어졌고 대립했다. 해임된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대통령의 말을 따르지 않은 죄로 박해 받는 순교자처럼 행동하며 트루먼을 공격했고, 미국인들은 맥아더를 환영했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정치인들은 유행처럼 트루먼을 비난했다. 맥아더는 대통령을 꿈꿨지만 한때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전을 종전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방문해 비밀 계획이라며 메모를 전달했다. 적군의 집결지와 북한 내 시설에 원폭을 투하하고, 적의 주요 보급로와 통신망을 봉쇄시키기 위해 방사능 폐기물로 오염 지대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원자 폭탄 계획을 승인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고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감춰진 일본의 음모, 핵 개발 : 박건식 2005년 6월 12일 (일) / 제 98 회
 일본이 2차 대전 중 원폭을 개발한 것은 최근까지 비밀로 유지되어 왔다. 일본은 원지폭탄에 관한 한 언제나 피해 국가였고, 그 점을 이용해서 평화의 사도로 자처해 왔다. 그런데 일본이 2차 대전 중 원폭을 개발했다고 하면 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되므로, 한사코 원폭 개발 사실을 감추려 했다. 미국 역시 원폭 개발 문제의 언급 자체를 꺼렸는데, 이 문제가 논쟁이 되면 바로 대량 살상 무기인 원자폭탄 투하의 타당성과 전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본 원폭 개발 연구팀은 한국에 관심이 높았는데, 흥남에 해군 함대 지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에는 우라늄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광물이 많았고, 원폭 개발에 필요한 전력과 물이 풍부했다. 흥남은 공단인 동시에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미사일과 고성능 폭탄을 제조하는 비밀 군사기지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전쟁 때 맥아더는 흥남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려 했고, 가공할 폭탄을 퍼부었던 것이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위기를 느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본에도 핵 연구와 개발을 하도록 함으로써 소련을 견제하는 카드로 삼고자 했다. 이에 일본은 원자력기본법을 통과시키고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이 법안에는 쇄빙선과 우주 로켓의 개발까지 가능하게 했는데, 핵잠수함과 핵무기 발사체로의 전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일본은 최근 북한 핵 위협을 이유로 그동안 금기시돼 왔던 핵무장 논의가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핵 위협을 강조하는 본심은 다른 데 있다는 주장도 있다. 북핵 문제를 지렛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과 같은 국제 어젠다를 형성해 갈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다시보기는 65화부터 로그인만 하면 모두 무료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파이어폭스에서는 다시보기 페이지가 제대로 뜨지 않고,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제대로 나온다. 대신 영상을 보기 위해 ActiveX를 설치해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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