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4] 세비야의 세마나 산타

Posted 2013. 6. 19. 22:15

 23일 일기는... 살릴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겠다. 어제 마라케시에서 세비야에 도착한 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세비야에 도착 후 자연스럽게 HTC 플라이어를 켰다. - 비행기 안에서는 껐다. - 부팅이 되는 듯 하다가 암호를 입력하자 다시 리부팅 되었다. 처음에 뭔가 설정을 잘 못 잡아서 그런 줄 알고 다시 시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또 다시 리부팅. 오래 누르면서 리부팅을 해보기도 하고, 심 카드를 뽑았다 껴보기도 했다. 그러나 똑같았다. 몇 번을 리부팅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혼자 계속 무한 반복이다. 포기하고 그냥 가방 속에 던져 넣었다. 다음날 확인해보니 거의 방전되어 되지 않을 뿐, 리부팅 현상은 여전했다.

 고로 어제 밤부터 기분이 안 좋다. 모로코에 대한 감상을 쓴 긴 일기를 날린 것부터 시작하여, 잘 되던 기계가 동작되지 않는 짜증, 여행에 필요할 거 같아 GPS를 이용하는 오프라인 맵 등 여러 앱을 설치해 놓은 게 무산된 것에 대한 당혹감 등등. 어떻게 해야 할 지 머리는 하얘지고, 답은 안 나오고... 여기서 핸드폰을 새로 산대도 한국에서 쓸 수 없고. 아이패드는 GPS가 없고. 내일 세비야를 떠나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HTC 서비스 센터를 찾는다 해도 바로 고칠 수 있을 거 같진 않고. 답이 안 나온다.


 전에 올린 23일 글과 겹치는 앞부분이다. 노트북을 가져가서 이렇게 저 당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게 다행이다. 다시 생각해도, HTC... 후....


 이런 기분으로 오늘 아침 시작. 전날 거의 한 시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피곤하였지만, 미사 볼 사람도 있고, 성당 구경을 위해 준비가 다 된 상태로 9시 반에 아침을 먹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10명이 쓰는 방이다 보니 신경이 더 쓰였다. 7시정도부터 뒤치락댄 거 같다. 지금 일어날까 하다가, 세면장에 사람도 있는 거 같고, 지금 일어나면 너무 일찍 일어나서 짐 정리할 때 부스럭거려서 다른 사람 방해할 거 같기도 하고.

 8시가 되었나. 동생도 일어나는 거 같아 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세면장이 쉽게 비질 않았다. 머무는 사람 수에 비해 세면장 수가 너무 적었다. 샤워장 2개, 세면대 3개, 변소 하나, 변소 + 샤워장 + 세면대가 있는 큰 화장실 하나. 씻는 것 보다 화장실 가는 게 더 급한데 사람이 너무 많다. 특히 남녀 공용이다 보니 화장실 이용하기가 좀 그랬다. 밖에서 사람들 세수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큰 일 본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 그런 거 따질 건 없는 거 같다. 다른 외국 사람들 보니 잘만 화장실 이용하더구먼.

 어제 못 한 짐 재정리를 하고 뭐 하다 보니 약속했던 9시 반이 넘었다. 빨래를 하고 싶었는데 사람이 많아 하지도 못 하고 어찌할지 모르고 안절부절 못 하였다. 결국 늦어져서 거의 10시에 밥 먹은 거 같다.

 밥 먹고 양치하고 바로 다시 모이기로 했는데 이래저래 하다 또 늦어졌다. 오늘부터 축제 기간이라 구경할 경로를 짜기로 했는데 점점 늦어졌다. 10시 미사 참석은 자연스레 포기됐고, 12시 미사는 들어가기로 했다.

 서둘러 성당으로 향했다. 처음 세비야 성당을 들어가 봤는데 매우 웅장했다. 밖에서 봐도 큰 성당인데 역시였다. 그런데 똘레도 성당을 보면서 부터 느끼는 건데 이젠 성당도 눈에 익는다. 뭔가 비슷한 구조로 돼 있는 거 같다. 좀 더 둘러보면서 히랄다 탑과 콜럼버스 무덤도 보고 싶었는데 미사 중이라서인지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됐다. 아니, 거의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내부 구조만 조금 보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사 등으로 성당 내부가 번잡하여 사진을 찍지 못 했다.>


 동생과 또 한 명은 미사를 보기로 하여 나와 다른 일행 두 명은 밖을 둘러보다가 2시에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한 명이 갖고 있던 책자에서 추천한 산타 크르주 거리, 즉 유태인 지구를 둘러보기로 했다. 마치 차이나타운처럼 스페인 도시마다 유태인 지구가 있는 거 같다. 한두 군데 작은 성당에도 들어가 보았다. 동네 작은 성당처럼 생겼는데 안은 으리으리하였다. 과거 종교 힘이 얼마나 셌는지, 그리고 많은 재물이 교회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돌아다니다가 2시에 다시 모두 모였다.


<세비야 거리>




<세비야의 흔한 동네 성당.jpg>


<이따 축제 때 또 보게 되는 성모 마리아 상>


 한 명이 양말과 속옷이 떨어져 잠시 살 겸 슈퍼에 들렀다. 그러나 없어서 배도 고프고 하여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근처 슈퍼에 다시 들러 샌드위치와 마실 거를 사갔다. 간단히 때우고 축제 구경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북소리가 들려 그 곳으로 가보니 군악대가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도 같이 동참했다. 사람들을 보니 잘 차려입었기에 우리도 다시 숙소로 돌아가 좀 차려입고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워낙 사람이 많고 차단된 길도 있어 숙소로 가는 길로 가지 못하고 군악대를 따라가게 됐다. 가다보니 한 성당 앞에서 멈추었다. 아까 셋이 돌아다닐 때 들어갔던 성당이었다. 이 성당 앞에서 무언가가 열리는 거 같았다. 바리케이드가 처져있고 사람들은 그 밖으로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군악대만 따라가다 보니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의도치 않게 먼저 기다린 사람들을 가리며 민폐를 끼치게 됐다.

 KKK를 연상시키는 고깔모자인 까삐로떼(capirote)를 쓴 사람들이 먼저 지나갔다. 그리고 성당에서 예수 상이 있는 큰 무대 같은 걸 들고 나왔다. 이후 다시 고깔모자와 군악대가 지나갔고, 다시 성당에서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무대가 나왔다. 웅장한 퍼레이드였다. 그 유명한 세마나 산타(Semana Santa)가 진행된 것이었다.



<세마나 산타 시작>


<귀여운 꼬마애가 우리 일행에게 사탕을 나눠줬다. 그걸 부럽다는 듯이 처다보는 보라색 옷차림의 꼬마애ㅎㅎ>


<성당에서 예수 상 나오기 시작>


<예수 상 등장>



<예수 상 옆면과 뒷면>


<성모 마리아 상이 나오면서 성당 문은 닫혔다.>


<성모 마리아 상 뒷면>


<행렬을 뒤따르는 악단>


 이후 우리는 겨우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비가 한 두 방울 내리기 시작하였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미리 한 장소에 가서 좋은 자리맡아 잘 구경하려 했는데 비 때문에 그 행사가 진행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일정이 바뀌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멍하니 있느니 뭐라도 하자 하는 생각에 일단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터미널로 갔다. 내 신용카드를 시험해보기 위해 티켓 기계에 넣어봤는데 비밀번호를 입력도 하기 전에 카드 오류로 진행이 안 되었다. 체크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우려했던 일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신용카드 2개와 체크카드 하나를 가져갔었는데, 믿을 건 신용카드 하나뿐이었다.


<비가 한 바탕 쏟아진 후 축제가 준비됐던 광장은 썰렁해졌다.>


<갈 곳 잃어 당황하는 사람들... 이라고 추정>


 포장된 음식 등을 간단히 조리하여 먹고 내일 일정 정리와 그동안의 지출 정산을 하였다. 그러나 얘기하다보니, 뭐, 내일 일정은 결국 정확히 정해진 게 없었다.


<인스턴트식품이긴 하지만, 저녁 식사. 그래도 하몽(왼쪽)은 꽤 상(上)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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