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주제 사라마구 (해냄출판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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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스포일일지 잘 모르겠네요.^^;)

전에 올린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남들보다 한 박자-혹은 몇 박자- 늦게 읽게 됐네요. 행여나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알지 모를 불안감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술술 넘어갔네요.

소설은 한 사람이 눈이 멀기 시작하더니 전염병처럼 여러 사람이 눈이 멀어가면서 수용소에 보내지며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여기서 극적 긴장감을 주는 인물로 안과의사 아내가 등장합니다. 안과 의사 아내는 수용자들 중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입니다. 남편인 안과 의사를 돕기 위해 위장하고 수용소에 들어온 것이지요.



인간의 원초적 문제, 섭취와 배설

눈이 멀면 참 불편할 것입니다. 눈을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보세요. 아마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더듬거리며 길을 찾게 될 거에요. 장소가 익숙한 곳이라면 그나마 난데, 낯선 곳에서 길을 찾게 되면 훨씬 더 불편하겠죠. 장애물 아닌 장애물에 많이 부딪히기도 할거구요. 잠시만 생각해도 눈이 멀게 되면 생각나는 불편함이 한 둘이 아닙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런 불편함 말고도 훨씬 더 원초적인 문제를 얘기합니다. 바로 먹고 싸는 것이지요. 갑자기 눈이 멀게 되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수용자들은 수용소를 관리하는 군인이 배급해주는 식량에 의존하게 됩니다.

용변을 보는 일은 더 비참합니다. 화장실을 찾아가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화장실을 찾았다 해도 변기를 찾는 것도 또 문제가 될 것이고요. 휴지는 제대로 찾을까요. 그리고 휴지는 항상 보급이 될까요. 화장실 바닥은 물론 복도 바닥도 오물로 엉망일 테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개인의 몸이겠지요. 위생 문제가 심각해 질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사회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사회, 혹은 조직에 관한 문제입니다. 비록 수용소를 군인들이 관리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전염이 두려워 수용자들과의 접촉을 꺼려합니다. 결국 수용소 안은 눈먼 사람들의 사회인 것이지요.

눈먼 자들의 초기 혼란은 원시 세계에서 사회가 탄생되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들이 부딪히면서 점점 나름의 규칙을 찾아가고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지요.

안과의사는 조직의 필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구난방 떠들기만 할 뿐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사람들 앞으로 나서서 ‘조직을 구성합시다!’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소설 내내 안과의사는 아내에게 조직의 필요성을 계속 얘기합니다.

조직을 구성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눈이 멀고를 떠나서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자기 의견을 내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강하게 뭘 하자고 주장하면 거기에 따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마지못해 따르지만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편한 마음이 큰 사람들, 즉 나 아닌 누군가가 나서서 뭘 하자는 것이 고깝게 느껴져 반감만 생기는 사람들도 있겠죠. 이렇게 되다보면 자기주장이 난무하게 되고 중재자가 필요해집니다.

소설에서는 수용소의 방마다 한 명씩 대표자를 선출합니다. 수용소 전체의 일은 이 대표자들이 나와 대화를 하며 의견을 모으게 되는 것이지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도 그렇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결국 대화입니다. 처음엔 물론 시끌시끌하며 의견 통합이 잘 안 되지요. 그러나 계속된 의견 교환을 통해 대안을 찾고 합의점을 도출합니다. 눈이 보이고 안 보이고를 떠나 인간의 사회화 과정이 비슷함을 보여줍니다.

저는 여기서 발칙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성대모사를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이 먼 사람들 속에서 타인을 구분하는 것은 (만지지 않는 한) 목소리가 아마 유일한 수단일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품고 성대모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눈먼 사회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계급의 탄생?

먼 옛날 부족 사회를 생각해보면 부족 간의 갈등은 아마 먹을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더 단단한 무기를 가진 부족이 승리하게 됩니다. 소설 속 눈먼 사회에서도 이런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 맞게 무기는 총입니다. 한 쪽은 총 한 자루를 갖고 있는 반면 다른 쪽은 이에 대응할 무기다운 무기가 없습니다. 부족 간의 싸움 단계를 뛰어넘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구분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지배 계급인 깡패 집단은 한 손엔 총을, 다른 한 손엔 식량을 들고 있습니다. 식량을 담보로 총으로 위협하며 일반 수용자들을 억압하는 것이지요. 깡패들은 처음에 수용자들에게 금품을 요구합니다. 눈이 보이지도 않는 데 금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아마 이들은 금세 눈이 치료되어 밖으로 나갈 것을 희망했나 봅니다.

금품을 요구한 깡패들은 다음에 뭘 요구했을까요? 여기서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이 그려집니다. 바로 성욕이죠. 인간의 3대 욕구로 식욕, 수면욕, 그리고 성욕을 듭니다. 수용소의 침대에서 잠은 잘 자고, 식량도 매일 확보하니 성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단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본성

이 소설을 읽으며 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했어요. 인간의 본성은 익명성과도 연결돼서 생각이 되었고요. 익명성은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다는 것이고, 결국 남에게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눈먼 사회에서는 남이 보든 말든 상관이 없게 됩니다. 말장난 같지만 본다는 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익명성이 전제되면 얌전하던 사람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내용이 있죠.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눈먼 사회에선 이웃집의 먹을 것을 훔치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말하지 않는 이상 내가 이웃임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이웃이라는 도덕관념보다 식욕이 우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남의 시선, 남의 평판이 두려운 것 이전에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우선시되는 것이지요.

주제 사라마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해 얘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소설 속의 대화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p.354) ...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
일반적인 감정은 볼 수 있는 사람의 감정이었고, 따라서 눈먼 사람들도 눈먼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눈먼 사람들의 진짜 감정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어, ...


눈이 멀게 되면서 감정이 바뀐다, 새로운 감정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던 도덕이라는 것은 눈먼 사회에서 점점 무너져갔습니다. 단순히 눈먼 사회에서만 이런 감정의 변화가 나타날까요.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쉽게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라 여겼던 것이 본성이 아니고 가식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언제까지 머릿속에서 인성, 도덕, 수치심 등을 떠올리며 버틸 수 있을까요?



만약 모두가 눈이 멀었다면?

만약 소설에서 안과의사의 아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즉 모두가 눈이 멀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헌신적, 혹은 영웅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눈 뜬 인물인데, 실제 현실에서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눈먼 사람들 속의 눈 뜬 사람, 즉 초인적인 힘을 가진 사람인데 이는 결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인물이고 우리 주변에서 찾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러니 모두가 눈먼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 거죠.

만약 모두가 눈이 멀었다면, 당연하게도 새로운 소설을 써야 되겠죠. 본 소설보다 더 큰 혼란으로 시작될 것이고, 점차 안정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거 같습니다. 거의 신인류의 등장이지요. 이런 내용은 또 다른 소설로 기대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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